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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일어난 김에’ 씨의 이상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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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뜰에서 온 편지-‘일어난 김에’ 씨의 이상한 하루
  • 채동균
  • 승인 2023.12.0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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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백한다면 별자리, 혈액형, 태어난 일시에 따른 사람의 특징이나 운세를 잘 믿는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보다는 더 복잡한 삶의 경험과 판단력, 환경, 건강, 인간관계와 같은 수많은 변수로 삶의 길을 선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적게는 십수 년, 많게는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가까운 이들을 보면서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면 혈액형 같은 단순한 지표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약간은 영향을 줄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4인 가족 중 나 혼자만 A형 혈액형이다. 다른 가족은 B형 AB형 이런 구성인데, 나와 가족 간에 몇 가지 극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이 글에 어떤 부분에서도 함께 하는 가족을 폄훼하려는 생각이나 의도는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 혹시나 가족이 이 글을 보는 날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출구를 먼저 찾아놓고 글을 이어가려 한다. 가족들은 나에 비해서 훨씬 정신적인 내구력이 강하다. 어떤 의미인가 하면 나는 평소 작은 먼지도 치우고 봐야 하는 성격임에 비해서 가족은 작은 먼지쯤이야 존재하지 않는 듯 무시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다. 최근 이런 담대함이 어느 정도인가 관찰을 위해서 청소하기를 얼마간 멈추고 살펴보니 작은 먼지들이 서로 모이고 모여서 동글동글하게 굴러다니는 정도도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하는 가족들의 마음 씀씀이에 경탄하는 지경이었다. 그 이상은 관찰 실험을 이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거실 바닥에 북미 서부 덤불 같은 것들이 바람 불면 굴러다니는 즈음에서 청소기를 들고 덤불과 작별을 고했다.

초등학교 다니던 당시에는 예절 교육 수업을 방학 중에 ‘여름 방학 특별 예절 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운영했는데, 부모님은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특별 수업을 빠짐없이 보내주었다. 아마도 예절 바르고 늘 깨우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라 짐작하는데, 덕분에 귀찮고 좋은 습관을 갖게 되기는 하였다. 귀찮고 좋은 습관 중 하나는 화장실 청소 습관인데, 화장실을 바닥부터 손이 닿는 수전까지 깔끔하게 청소를 해야 한 주를 마감하는 기분이 든다. 수전이나 물이 자주 닿는 곳은 늘 닦고 물기를 말리지 않으면 세균이 번식해서 황갈색의 침전물이 생기곤 한다. 예절 학교에서 배운 방법대로 수십 년을 청소해온 탓에 청결한 화장실 가꾸기는 일종의 의식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앞서 먼지 덤불에서 짐작했겠지만, 물때 낀 수전 같은 것은 나에게만 문제가 되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주말이면 두 개 화장실을 오가면서 수전에 붙은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서 불리고 닦아내고 말리는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상황이 이쯤 되니 가까운 가족은 내가 청소를 좋아하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한다면 부지런하지도 않고, 청소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먼지 덤불이 굴러다니고 반짝이던 수전이 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견디지 못할 뿐이다. 정확히 측정해본 일은 없지만, 나는 평균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게으른 사람에 속한다. 게으름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거리의 직장에 다니는 것이 귀찮아서, 단지 그게 싫어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일이 있을 정도이다. 직장 생활 하는 사람이라면 업무로 만들어지는 각종 엑셀, 워드, 한글, 이미지 파일을 용도나 목적에 맞게 폴더에 정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게으른 탓에 그런 일도 잘하지 못한다. 날짜별로 폴더를 만들어 대충 모아 놓고, 필요할 때마다 검색해서 찾느라 곤욕을 치르곤 하는데 그럼에도 잘 정리하는 것이 귀찮아서 지금까지도 똑같이 살아오고 있다. 그러니 나는 가족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지런하거나 정리 정돈에 능한 사람이 못 된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수전을 닦고 청소를 하고 배수구에 쌓인 더러움 닦기를 담당하고 있다.

가족들의 오해 덕분에 가정에서 얻은 호칭이 있는데, 그것은 ‘일어난 김에’이다. 가족은 내 이름보다 ‘일어난 김에’로 더 자주 부르곤 하는데 쓰임새는 다양하다. ‘일어난 김에 따뜻한 물 한 잔만 떠다 줘요’ 라거나, ‘일어난 김에 마루 어딘가에 있는 휴대폰을 가져다줘요.’와 같이 사용한다. 주말이면 가족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나서 책을 본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밀어두고 못 보았던 영화를 보는데 시간을 쓰다 보니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도 ‘일어난 김에’ 씨가 된 이유인 듯도 하다. 사람이 뭐든 최선을 다하면 능숙해진다고, ‘일어난 김에’와 함께 주어지는 다양한 임무를 오랫동안 수행하다 보니 이제는 ‘일어난 김에’ 뒤에 오는 요청사항이 뭔지 듣지도 않고 파악하는 능력도 생겼다. 이쯤이면 휴대폰 아니면 물 한잔, 현관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겠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에 바쁜 나를 제외하고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 업무상 급한 일을 남겨두고 여행 가는 것은 청소하지 않고 수전을 사용하는 것처럼, 동글동글한 먼지 덤불을 모른 척 남겨두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 선뜻 여행 갈 용기가 없었다. 가족 여행이 있기 한 주 전 주말 아침 평소처럼 일찍 일어난 나는 ‘일어난 김에’ 여행지 경로나 한번 잡아보라는 가족 부탁에 여행지를 살피다가, 차량 렌트에 관심이 생겨서 덜컥 일정에 맞게 렌트를 신청해버렸다. 렌트 차량을 신청한 김에 직장에 제주 여행 일정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 양해를 구한 김에 아내에게도 이야기하여 비행기 표를 한 장 더 예약했고, 겨울 바다가 철썩이는 제주로 향하게 되었다.

그렇게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난 김에’ 가족과 동행하게 된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가득했다. 출발하는 비행기는 난기류 속을 날았는지 흔들림이 심해서 40분 정도밖에 안 되는 비행시간이 반나절 같은 기분이었다. 제주에 도착해서 대여한 차량은 이동하는 중에 타이어에 문제가 생겨서 한 시간 거리를 되돌아가서 다른 차량으로 갈아타야 했다. 그 덕분에 아내가 공들여 예약했던 일정을 나 혼자만 함께 할 수 없었다. 갈아탈 차를 받고서 다음 일정을 위해 서둘러 돌아오다 보니, 새로 받은 차는 주유가 되어 있지 않아서 다른 목적지에 가족을 내려주고 혼자서 다시 주유소를 찾아 이동해야 했다. 주유하고 돌아오는 길에 익숙하지 않은 곳을 잘못 들어서서 먼 길을 둘러오는 일도 있었다.

하루가 이쯤 되면 불편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갈아탈 차를 찾으러 갈 때도, 주유할 곳을 찾으러 나설 때도 투박한 표현이지만 걱정해주는 가족이 있었다. 가족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예상하지 못한 불편도 여행의 작은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매일 새벽 출근하여 밤중에 돌아와서 한마디 인사도 나누지 못하는 일상에서 흐려지던 가족이라는 관계의 감사함을 새롭게 배웠다. 감사함이 맘속에 채워지니 불편한 시간 사이에 주어졌던 작고 소중한 것들이 새삼 아름답게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으로 가득한 하루였음에도 감사한 것으로 충만한 하루였다. 삶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담아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여곡절 많은 날임에도, 지는 해의 낙조를 함께 바라볼 수 있음에 기쁘고, 감사하다. 일어난 김에 시작된 여행처럼, 함께 한 김에 살아갈 앞으로의 날도 아름답게 물들어 가기를 소망한다.

글·사진 채동균(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

 

채동균…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연
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
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기
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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