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4:40 (일)
실시간뉴스
혜윰뜰에서 온 편지 - 회복에 관하여
상태바
혜윰뜰에서 온 편지 - 회복에 관하여
  • 채동균
  • 승인 2023.05.28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어느 날 꽃씨 하나가 바람에 날아와 땅에 닿았다. 꽃씨는 햇살 좋은 곳에 피어난 꽃으로부터 날아왔는데 그 꽃이 있던 토양은 가꾸는 이의 관심과 정성으로 적당히 비옥하고 적절하게 촉촉했다. 비바람이 심한 날에는 바람막이를 씌워서 지나치게 흔들려 쓰러지지 않는 배려를 받았다. 가뭄으로 애타는 날에는 하루도 지치지 않고 목마름을 헤아려주는 손길로 보살핌을 받았다. 주변이 해충으로 시름을 앓던 날에도 부지런한 배려로 해충을 막아주었다. 꽃은 건강하고 예쁘게 자랐고, 그 꽃에서 태어난 꽃씨 역시 단단하고 행복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바람 따라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꽃씨는 생각했다. ‘이제 내 앞에도 어머니 꽃처럼 아름다운 시간이 주어지겠지. 그리고 나 또한 나와 같은 예쁜 꽃씨를 키워 세상으로 나가도록 응원할 날도 오겠지’라고.

꽃씨의 기대와 달리 바람 따라 도착한 곳은 도시 건물 어느 옥상이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 옥상 한쪽 편 도시의 먼지만 쌓여 양분이라고는 없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꽃씨는 바람이 이곳 5층 건물 옥상에 자신을 떨구고 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떠난 자리에 앉아서 허공에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떠난 바람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상상해보건대 바람에는 아무런 뜻도 없었을 것이다. 건물이 5층이 아니고 6층만 되었어도 힘에 부쳐서 꽃씨를 그곳까지 올리지 못하고 인근 화단 조금은 포근한 땅에 꽃씨를 떨구어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바람이 지나는 길에 우연히 5층 건물이 있었고 건물 옥상 난간 사이로 지나는 길에 자신을 타고 온 꽃씨가 홀연히 떨어진 것뿐, 다른 바람이나 의도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 바람을 타고 여행을 시작한 것은 꽃씨의 선택이었으니까.

꽃씨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대로 새싹도 틔우지 못하고 자신의 이야기가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날아오를 때 꿈꾸던 희망은 사라져버렸다. 스스로 힘으로 다시 날아오를 수는 없었기에 운명을 받아들일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꽃씨의 운명을 바꾸는 작은 사건이 일어난다. 건물 옥상에는 물탱크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물탱크는 경기도 외곽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한 것이었다. 물탱크를 만드는 공정에는 불량을 검사하는 과정이 있는데, 검사하는 직원이 전날 상갓집에서 밤샘한 탓에 검수 과정에서 원래라면 찾아냈을 작은 균열을 확인하지 못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작은 균열을 가진 물탱크는 그대로 시장에 나갔고, 꽃씨가 떨어진 같은 옥상에 설치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 꽃씨가 떨어진 날 그동안 안고 있던 균열이 커지면서 물탱크가 터지는 사건이 생기게 된다. 옥상에 물이 쏟아지고 그 한가운데 놓여 있던 꽃씨는 물살에 실려 옥상 구석진 곳으로 밀려가게 된다.

그래 봐야 옥상 가운데서 구석으로 밀려난 것뿐이라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다. 여기에 사소한 일이 하나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반전을 맞게 된다. 건물 관리인이 성실하게 관리하는 곳이었다면 옥상은 방수 공사가 되어 있었을 것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건물 옥상은 수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방수가 되지 않았고 도장이 벗겨진 곳에는 도시의 흙먼지가 쌓여 제법 포근한 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 단단한 땅에 떨어져 좌절했던 꽃씨는 홍수처럼 밀려온 물살에 다시 한번 놀랐지만, 새롭게 도착한 곳이 적당하게 촉촉하여 다시 한번 싹 틔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 * *

꽃씨에 기회가 된 물탱크의 작은 균열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던 피곤함. 그 원인이 되었던 장례식은 89세에 생을 마감한 어떤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였다. 고인에게는 두 명의 딸과 아내가 있었다. 71세인 아내는 45년을 남편과 함께 살았는데, 고인이 된 남편과 사랑으로 맺어졌지만 기대한 결혼 생활과는 달리 일상의 사소한 간섭과 구속에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왔다. 사랑으로 만난 인연이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일상으로 이어진 것은 불행이었지만, 늘 불행만이 함께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역할을 찾아 살아가는 두 딸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보람이 되었다. 함께 하는 동안 불편과 불안한 관계였음에도 남편이 떠난 자리에는 정이라는 빈자리가 주는 아픔이 있었다. 45년을 남편과 함께 세파를 겪으며 살아왔는데, 혼자된 지금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떠난 이의 빈자리에 자리 잡았다.

* * *

물난리 뒤에 옥상 한쪽에 자리 잡은 꽃씨는 아름답게 자라지는 못했다. 다행히 뿌리 내릴 수 있는 약간의 흙이 있었지만, 옥상 구석에 충분한 양분이 있을 리 없었다. 옥상임에도 주변 높은 건물 사이 5층 건물 옥상에는 낮 동안에도 그렇게 충분한 햇살이 비추지 않았다. 하루 두세 시간 동안 짧은 햇살의 도움과 가끔 내리는 비가 옥상 구석에 물웅덩이를 만드는 동안에 조심스럽게 꽃을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누가 봐도 아름다울 것 없는 앙상한 가지 몇 개와 함께. 처음 꽃씨가 바람에 날아올랐을 때 꿈꾸던 비옥한 흙과 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손길, 척박한 날에 돌봐주는 배려는 받을 수 없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시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난이 주는 고통을 감내할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자신만의 꽃씨를 바람에 실어 세상에 보낼 날이 찾아왔다.

꽃씨의 일생이 행복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꽃씨를 하늘 높이 올려보낼 때 문득 기쁜 웃음이 들린 것도 같다. 이야기는 그렇게 또 다른 꽃씨가 날아오르면서 끝나는 것 같았지만, 새롭게 날아오른 꽃씨 하나는 누군가의 돌보지 않는 정원에 떨어지게 된다. 그 정원은 어떤 이가 살아 있는 동안 애써 가꾸던 정원이었지만, 가꾸는 이 떠난 뒤에는 더는 찾는 이가 없는 공간이었다. 이 정원에 도착한 꽃씨는 이번에는 다행히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남편 떠난 뒤 미움과 그리움으로 정원을 찾지 않던 아내는 어느 날 창문 너머로 예쁘게 피어 있는 꽃을 보게 된다. 남편 생전에 꽃을 가꾸는 정원이 아니었기에 노랗게 핀 예쁜 곳은 남편 떠난 뒤에 찾아온 손님임을 아내는 알 수 있었다.

‘초대한 이도, 가꾸어주는 이도 없는데 너는 참 그곳에 예쁘게 피었구나’

 

민들레는 꽃을 피워 유성생식 하는 식물로 바람에 날리는 것은 홀씨가 아닌 씨앗이다.
민들레는 꽃을 피워 유성생식 하는 식물로 바람에 날리는 것은 홀씨가 아닌 씨앗이다.

 

아내는 문득 그 꽃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 그림을 좋아해서 남편과 관계가 좋았던 날, 정원 식물을 통해 보는 사계절을 화폭에 담는 것을 즐겼던 아내였다. 그날 아내는 오랫동안 창고에 두었던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꺼내서 민들레 꽃을 그렸다. 아크릴 물감이 마를 동안 창고에 두었던 다른 캔버스를 꺼내 보니 40년 전 남편과 함께 다닌 여행지를 담은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민들레 피어 있는 정원이 있는 집은 결혼 후 4년 동안 함께 고생해서 이사 온 곳이었는데, 평소 정원 있는 집을 꿈꿨던 아내의 희망을 담아 마련한 집이었다. 40년 전 그날 남편은, 세상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내를 위해 정원 가꾸기를 멈추지 않으리라 약속했고 아내는 그런 남편의 말에 따뜻한 안식을 느꼈다.

‘해 가기 전에 가지치기를 해두어야 하는데’

남편이 떠나기 전 했던 마지막 말이었다. 민들레 꽃을 그리던 아내는, 떠난 이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40년 전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는 것을 말이다. 정원 키 작은 나무 가지치기를 하나씩 할 때마다 예쁜지를 묻던 남편의 물음에는 아내와 함께 행복하기를 희망하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정원에 잔잔한 미풍이 부드럽게 흐른다.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구나’

‘이 바람을 타고 새로운 꽃씨가 날아오르는 날도 오겠지. 너도, 나도 예쁘게 살아보자’

미풍과 함께 아내의 마음에도 작은 민들레 꽃씨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치 떠난 이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글·사진 채동균(혜윰뜰도시농업공동체)

 

 

채동균…

영국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를 동경하여 영어영문학
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생활을 IT 기업에서 시작하는 비운
을 겪으며, 평생 생업으로 시스템 엔지니어로 활동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우연한 계기로 주민대표를 4년간 맡은 인연
으로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 대표가 되었다. 생업과는 별
개로 마을에서는 주민공동체 활동, 문화강좌 프로그램 기
획 등으로 이웃과 함께 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